인문학 스프- 싸움의 기술 209. 작문 지도의 유의점 - TopicsExpress



          

인문학 스프- 싸움의 기술 209. 작문 지도의 유의점 독서 지도의 유의점에 이어서 작문 지도의 유의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한 마디로 표현해서 ‘통째로 눈치껏’입니다. ‘통째로 눈치껏’ 글쓰기를 익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작문교사의 일차적인 과업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수(下手)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분절적(分節的) 사고’입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순서에 입각해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런 경향은 ‘조급증 내기’ 다음으로 많이 발견되는 ‘하수의 징조’입니다. 하수들은 하나 들으면 하나만 알아야 하고, 둘 들으면 둘만 알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나를 들으면 적어도 둘 이상을 알아야 하는 것이 문식(독서와 작문) 공부인데 그들에게는 그런 융통성이나 유창성이 없습니다. 게슈탈트(Gestalt, 부분의 집합체로서가 아닌, 그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유기체로 된 것)가 애당초 없습니다. 만약 그런 자가 제자를 두고 가르친다면 열이면 열 ‘눈뜬 소경’만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검도 수련도 비슷합니다. 몸으로 하는 공부지만 머리가 나쁘면 몸이 훨씬 더 고생을 합니다. 가령, ‘크게 들어서 치라(검도에서)’고 주문하면 타고난 하수들은 딱 그것만 합니다. ‘크게 들어서 치려면 크게 한 발 내디뎌야 한다’고 눈치로 때려잡지 못합니다. 그저 제 자리에서 투닥거릴 뿐입니다. 상대의 틈을 보고 단호하게 뛰어 들어가는 동작이 선행되어야만 크고 미려(美麗)한 기술이 가능한데 그 이치를 통으로 꿰지 못합니다. 그런 ‘몸을 버리고 뛰어드는 용기’를 배양하지 않은 채, (맞지 않고) 오직 상대방을 타격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좋은 동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그러하면 어디서든 그런 품새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검도든 작문이든, 칼이 곧 사람이고 글이 곧 사람입니다. 머리로 글쓰기를 익힌 자들은 글쓰기 교육에 ‘컴퓨터 모델’을 도입하려 애씁니다. 인풋과 아웃풋의 관계를 도식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집어넣으면 무엇이 나오는데, 이때 중앙 처리 과정은 이러저러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글쓰기의 발달과정은 기초(입문), 숙달(심화), 통달(응용)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들의 세부적 단계와 구성적 절차는 이러저러하다고 말하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그런 공부는 ‘글쓰기’에 대한 ‘머리공부’일 뿐이지 정작 절차적 지식 일반에서 요구되는 ‘손(몸)공부’는 되지 못합니다. 많이 알지만, 잘 쓰지는 못하는 자가 되거나(절름발이 지식인?), 소 목을 한 칼에 베는 것은 언감생심, 그저 쥐 대가리나 토닥거리는 글공부에 머무를 공산이 큽니다(발견이 없는 글쓰기). 마침, 그런 식의 ‘글쓰기 공부에 있어서의 분절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 있어 그 내용 중 일부를 옮겨 적습니다. 브루스 맥코미스키(김미란)가 지은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대학에서의 전문적인 작문 공부가 얼마나 현학적인 메아리를 울리는지도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예컨대 「작문과 문화연구(Composition and Cultural Studies)」에서 제임스 벌린은 무엇보다도 롤랑 바르트의 광고 연구와 존 피스크의 텔레비전 연구에서 끌어온 문화 연구 방법론에 의거해 창안에 해당하는 수사학적 탐구를 위한 발견 학습에 대해 서술한다. 벌린이 지도하는 작문 수업에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수시학적 탐구를 위한 문화 연구 발견 학습을 이용해서 광고가 생산하는 문화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를 쓴다. (51) 벌린의 발견학습은 확립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 연구 방법론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것이 학생들에게 광고의 문화적 의미 생산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도록 촉진하지는 못한다. 광고 분석과 특히 관련이 있는 벌린의 창안을 위한 발견 학습은 학생들이 텍스트가 어떻게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가를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발견 학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광고(잡지, 텔레비전 쇼 등)의 기호학적 맥락이 어떻게 핵심 용어들의 함축적 의미를 조건 짓는지 혹은 이 맥락이 특정한 이항 대립이나 사회 서사를 환기시키기 위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도록 자극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발견 학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핵심 용어, 대립, 서사(또는 이와 관련된 주체 위치)에 대한 특정한 비판적 입장을 정립하도록 고무 받지는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벌린의 발견 학습은 배치 맥락의 기호론적 영향력이나 비판적 소비의 정치적 효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문화적 의미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조사하는 ‘생산 비판(production criticism)’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브루스 맥코미스키(김미란),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 46-48] 위의 인용문에서 맥코미스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발견학습적(부분적)인 이해’가 글쓰기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생산론적 이해’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것이지요. 맥코미스키의 강조가 아니더라도, 그런 분절적인 사고로는, ‘단번에 소 목을 베는’, 크고 미려한 글쓰기를 깨쳐나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인간의 두뇌(사고와 감정)는 말이나 글보다 항상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것을 말이나 글로 포착해서 그것의 이치를 살피고 다시 그것을 이용해 거꾸로 두뇌 활동을 발전시키는 방법(모형)을 찾아내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복합적인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그 어더한 설명도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것은,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맥코미스키도 즐겨 사용한 것이라고 말한, ‘글 읽고 저자 따라 쓰기(read-this-essay-and-do-what-the-author-did)’가 가장 효과적인 글쓰기 공부법입니다(맥코미스키 역시 ‘작문의 세 가지 수준(텍스트적, 수사학적, 담론적)’이라고 해서 또 다른, 정교화 과정을 거친, ‘분절적 사고’를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물론 자신이 몰두하고자 하는 장르의 선택이 먼저이겠지요. 소설을 쓰고 싶으면 소설가의 글을, 시를 쓰고 싶으면 시인의 글을, 학문을 하고 싶으면 학자의 글을 많이 읽고 그를 따라 글쓰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통째로 눈치껏 그들을 답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견물생심(見物生心)’, 언젠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내 ‘글 욕심’이 나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견물생심’도 없이 그냥 튀어나오면(머리 공부로만 일관하면) ‘소 목’은커녕 ‘쥐 대가리’도 되기 힘듭니다. 성공한다고 한들 고작 누구의 아류에 머문 꼴을 보일 뿐입니다. 통째로 눈치껏, 세상을 사랑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하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열립니다. 모세 앞에서 홍해 바다가 열렸던 것처럼, 내 안에서도 작지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조급증 내지 않고, 묵묵히 좋은 글을 읽고 따라 쓰다 보면 반드시 길이 열립니다. 당근, 그 길에는 왕도(王道)가 없습니다.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내는 기적이 있을 뿐입니다.
Posted on: Tue, 23 Jul 2013 11:27:4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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