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October 17 The 193rd Daily Mass at - TopicsExpress



          

2013 October 17 The 193rd Daily Mass at DaeHanMoon (밀양송전탑 반대 단식 16일 째) * 여기 제 방에 오셔서 대한문 미사의 report 를 읽으시는 벗님들에게 하느님은 누구십니까? 믿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삶은 무엇입니까? 오늘 장동훈 신부님의 강론 말씀은 마치 신부님의 삶을, 믿음을 고백하는 듯 눈물이 나도록 장엄하였습니다. 목소리 우렁차서가 아니라, 아름답고 화려한 제대 위여서가 아니라, 최신식 스피커여서가 아니라... 너무도 진실된 살과 피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명예나 돈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라 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 합니다. 지당합니다. 허지만 이 오직 믿음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묻어 있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를 하느님이 그저 의롭게 여겨 주시는 것이라 루터는 말합니다. 곧 용서와 은총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달려 있음을, 모든 주도권을 하느님이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하느님 앞의 겸손과 자기 성찰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맥락이 잘려 나가고 나니 남는 것은 믿음이라는 단어 하나입니다. 어떤 믿음이란 말입니까? 역사와 맥락이 사라지고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참 뜻은 모호해 졌습니다. 루터와 바오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이야기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오직 믿는 사람의 구미에 맞게 이합집산만이 남았습니다. 남은 것은 내용 없는 껍데기 뿐입니다. 의미는 없고 결과만 남았습니다. 십자가는 없고 십자가 모양의 형틀만 남았습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죌레라는 여성신학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저 구름 속 어딘가에 신이라 부르는 초월자가 있다 치자. 그러나 그는 나와는 상관 없다. 내게 그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발칙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신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내 시간과 삶과 상관 없이 존재하는 무념의 하느님, 진공의 하느님, 역사를 넘어서는 비역사의 하느님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무의미란 뜻입니다. 오직 자신의 삶과 시간을 관통하는 실존적 하느님, 나와 상관 있는 하느님을 원했던 것입니다. 나로 인해 정말 죽고 그 때문에 내가 마음 설레고 그 때문에 죽을 각오하는 그러한 나와 상관있는 하느님을 그녀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하느님은 이러한 실존적 하느님입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 말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입니다. 나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한 실존에 대한 고백입니다. 때문에 나의 삶과 역사를 휘어잡는 하느님은 율법에 온전히 담겨 있을 수 없을 뿐더러 인간의 제사가 모두 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은 그를 따르는 삶, 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동화의 삶, 말씀이 내 삶에 새겨진 체화된 삶, 하느님 처럼 신화된 삶에서만 찾아지는 하느님입니다. 내가 곧 하느님이 되어야 찾아지는 하느님입니다. 바오로가 고백하는 하느님이 이러한 하느님이라 생각합니다. 바오로는 이러한 전적 하느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죽고 이제 그리스도가 산다.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예언자의 피울음은 시대의 피울음입니다. 그의 눈물은 시대의 눈물이며 백성들의 고난입니다. 그가 쏟아낸 말은 법전에서 주워담은 낱말들이 아니라 들에서 골목길에서 시장통에서 광장에서 길어 올린 희노애락, 생노병사의 사람들입니다. 그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밤잠을 깨워 자신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 주는 존재이고, 자신은 죽음의 이름을 입 밖에 낼 것임에도 결국에는 초를 들게 만드는 집요하며 끈덕진 존재입니다. 예언자가 하느님을 발견하는 정서는 고요한 정적이 아니라 모래바람이 자욱하게 올라와 사위가 구분되지 않는 혼돈 속이며 고함소리 가득해 귀가 윙윙 거리는 장터입니다. 그는 그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율법학자의 충실함이 법전의 글자에 대한 것이라면 예언자의 충실함은 인간 눈물 속의 말씀입니다. 율법학자의 하느님이 구미에 따라 취사선택이 가능한 존재라면 예언자의 하느님은 벗어날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나를 온전히 사로잡는 실존입니다. 하느님을 앞뒤 맥락 잘라버린 토막짜리 격언으로 만드는 세상입니다. 그럴 듯한 이야기, 처세술, 격언, 지혜서... 그렇게 하느님을 책 속에, 고요한 경당에, 피정 집 뒷동산에 무념 무상의 격언으로 있으라고 종용하는 세상입니다. 복음은 예언자의 피울음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울고 하느님 때문에 구원을 알리며 저주받은 인간들의 도시를 성큼성큼 들어가는 무모함입니다. 어느 때든 내 삶의 자리를 털고 다른 주인에게 갈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온전히 사로잡힌 헌신의 삶, 투신의 삶입니다. 제발 성당으로 돌아가라, 제발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라 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솔직해 지십시오. 당신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권력을 권세를 수호하기 위해서 값싸게 하느님을 들먹이고 하느님을 수호하고 믿음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없습니다. 있다 해도 그러한 하느님은 나와는 상관없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예언자의 눈물같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하는 실존적 단순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에둘러 가지도 않고 선택할 여지도 주지 않습니다. 곧장 나를 향해 육박하는 그 말씀을 담을 그릇은 규율도 규범도 화려한 예식도 아닙니다. 그 그릇은 오직 나의 삶, 내 실존입니다.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고백입니다. 운명같은 어쩔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이 엉망징창입니다. 믿음은 없고 교조만 남았습니다. 눈물은 없고 운동만 남았습니다. 인간은 없고 정치만 남았습니다 서사는 없고 격언만 즐비합니다. 내가 고백하고 사랑해 마지 않는 십자가는 없고 언제든 띠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십자가 모양의 형틀만 남았습니다. 이곳 대한문의 193일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회복하고 눈물을 나눈 시간입니다.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찾고 빼앗긴 서사와 역사를 봉헌하는 시간입니다. 손수 십자나무를 곱게 깎아서 진짜 구세주를 정성으로 모시는 시간입니다. 복음에 설레고 복음에 울고 복음으로 밤잠을 설치는 인간들의 자리, 눈물들의 자리, 역사들의 자리, 하느님 닮은 인간들의 자리가 바로 193일의 대한문의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서로 힘내고 격려합시다. 장동훈 신부님의 강론 말씀 발췌
Posted on: Fri, 18 Oct 2013 08:2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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