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제자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 TopicsExpress



          

[기독교 제자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통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벧전 4:19). 지금까지 다루었던 고통의 샘들이 신비하게 발생하는 것이라면 지금 다루려는 이 고통의 샘은 그 근원도 신비할 뿐 아니라 또한 왜 이 고통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 고통에는 커다란 파도가 일지만 그 파도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광스러운 목적이 있기에 그 고통은 구속(Redemption)으로 승화된다. 강렬한 폭풍은 하나님의 위대한 날에 쓰일 불붙은 화살을 만들어 낸다. 체스터튼(G. K. Chesterton)은 욥기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방법으로 욥을 위로하시고 욥은 처음으로 위로받는다. 엘리바스가 대답하고 욥이 다른 대답을 하지만 고난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가운데 욥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님은 단지 대답을 거절하신다. 그런데 어쨌든 고난의 문제가 해결된다. 욥은 하나님께 수수께끼 하나를 던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수백 개의 수수께끼를 던지신다. 욥은 평강을 누린다. 그는 하나님께서 던지신 수수께끼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는다. 모든 케케묵은 생각들, 감상적인 것들, 시적인 것들, 자세한 논리적인 설명이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 표현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미세한 음성은 끊임없는 수수께끼를 내신다. “나의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잠깐 후, 우리는 우리의 진부한 신발을 벗어 던지고 십자가 앞에 선다. 수수께끼는 여전히 더 깊고 혼란스럽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사 53:10). 우리는 ‘누가 우리의 소식을 믿을까? 하나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날까’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주께 고개를 숙이고 주를 경배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생하는 고난의 샘은 대단히 깊다. 욥은 자기에게 발생하는 사건의 서론을 알 수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도 알지 못했다. 욥은 하나님과 마귀가 욥의 영혼을 두고 시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없다. 욥의 고난은 자신 때문이 아니다. 그를 훈련하고 정화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욥은 단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이란 온전한 성도들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우리는 언제나 배울 수 있을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주시는 것은, 우리가 담대하여지는 것은 진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큰 고통을 당하여 우리의 갇힌 영혼이 해방되어 평강을 누리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겸손하여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전혀 그들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주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하신 말씀이 더욱 깊고 진실한 의미로 울려 퍼진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즉, 내 뜻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정확하게 우리 주님을 향한 사탄의 유혹이었다. 또한 거룩하게 된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탄의 유혹이기도 하다. “네 자신에 대한 네 권리를 취하라. 그리고 네 자신의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8). 인생의 딜레마 가운데, 파도와 풍랑이 감당할 수 없이 내리칠 때, 창파가 일 때, 그때 주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인의 음성이 무슨 의미인지를 배우게 된다. 만일 당신을 잘 따르는 강아지의 발에 가시가 있다고 하자. 발에서 그 가시를 뽑을 때 그 강아지는 매우 아플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강아지의 발을 잡아 가시를 뽑고 상처를 씻고 약을 바른다. 이때 강아지는 매우 아픈 가운데 멍청히 당신을 바라본다.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주인을 믿고 그 자리에서 견딘다. 강아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주인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또한 지금 하시는 일로 인하여 나는 너무 아프지만, 그러나 계속 진행하세요. 저는 참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종류의 고통을 당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신뢰다. 아마도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임할 때 우리는 어쩌면 가장 뼈저린 고통을 겪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주께서 하시려는 일을 이루시길 원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할 때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단계가 될 것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더 나은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영적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고난은 이미 그 영혼을 깊게 하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눈으로 고난을 바라보면 그 입술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비방하게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단지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때는 결국 하나님을 미워하게 된다. <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굳게 서라. 요동함이 없는 주의 손길 아래서 불굴의 용기를 가지라. 그곳에서의 기다림은 당신을 지극히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주의 손길에 의하여 당하는 고통은 어렵지 않다. 만일 당신이 주의 얼굴만 볼 수 있다면, - 어두움 속에서라도! 이것이 마지막 시련이다. - 주의 뜻대로 이루소서.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받으셨다면, 당신도 그래야만 한다. 어찌 흉내로 고난을 겪을 수 있으랴! 주의 얼굴도 볼 수 없고 주의 손길도 느낄 수 없다. 오직 잔인하게 짓밟는 사람들 외에는. 그러나 쓰라린 밤에 우리 주님이 오신다. 포도주 틀을 밟으신다. 눈으로 보이는 대로 행하지 말고 믿음으로 행하라. 인내하라. 인내하라. 끝까지 충성하라! > (해밀톤 킹, Harriet Eleanor Hamilton King, 1840-1920: 영국 시인, 『제자들』(1873) 저자, 챔버스는 이 시인의 서사시를 좋아하여 많이 인용했다. - 역주)
Posted on: Sat, 09 Nov 2013 23:16:25 +0000

Recently Viewed Topics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