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알의 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 공적신학과 - TopicsExpress



          

한알의 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 공적신학과 교회 연구소/동역자들 믿음의 형제들에게: 그 동안도 모두 주님의 은혜가운데 지내시는 줄 믿습니다. 오랫 만에 저희 “시냇가” 교회와 저의 소식을 전합니다. (1) 그 동안 저는 우리 교우들의 허락으로 휴가를 얻어 미국에 10월 14일-31일 기간 다녀 왔습니다. 1) 주되는 이유는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제 아내가 이번 여름 동안 우리나라에 오지 못해서 대신 제가 그곳의 가을 방학을 틈타 갔다 왔습니다. 2) 또한 “한 알의 밀” 형제 중에 로스엔젤리스에 살고 있는 김현환 목사님과 박삼숙 권사님을 만나고, 오래 전에 제가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안동교회”의 청년부 지도 전도사/목사로 봉사할 때 (1981-1985년) 함께 신앙 생활했던 이용식 집사님과 김성태 집사님을 만나고, 나아가서 장신대 신학교를 함께 다녔던 노진걸 목사님을 만나는 일도 미국 방문의 이유였니다. (2) Los Angeles에서 김현환 목사님(미국 유니테리안-유니버살리스트 교회 목사)을 만나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김목사님이 그곳에서 통일 운동의 중심적 역활을 맡아 일하고 있지만, 남북의 화해와 통일 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이 지쳐있고, 교민 사회로 부터 소외된 가운데, 젊은 세대가 길러지지 않아 좌절을 겪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통일 운동을 하는 분들이 교민교회에 크게 실망을 하여 “기독교를 졸업했다!”고 까지 낙담하고 있어, 통일 운동하는 분들이 기성교회가 변하기를 앉아 기다리지 말고 새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를 강력히 권했습니다. (3) 장신대 친구인 노진걸 목사님이 섬기고 있는 풀러튼 장로교회(Fullerton Presbyterian Church) 에서 설교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제적 600여명의 건실한 교회로 아침 8시 1부 예배와, 11시 2부 예배에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라!”(시편 90편/ 마태복음 6장 25-33절)란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교인들 구성이 1960-70년대의 이민 첫 세대의 70세 이상 교인들이 2/3이상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서 그 분들에게 들려질 수 있는 설교를 준비하느라 고심을 했습니다. 내용은 시편 90편 10절의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는 말씀 처럼 우리는 삶의 허무성, 공허함, 무상성을 벗어날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서도 11절의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기도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90편의 시인이 간구했던 지혜의 마음은 마태복음 6장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하는 걷잡을 수 없는 생의 염려와 불안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해답을 주신 33절의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에 삶의 궁극적 지혜가 놓여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내 자식의 교육과 행복, 가족의 건강, 사업에서의 성공과,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나아가서 영향을 미치는 존재를 신앙으로 이루고자 하는 아주 “사적인”(private) 신앙에 사로잡힌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의 주권을 가진 이 세상의 다스리심)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라는 삶의 헌신을 하고 있는지에 도전했습니다. 가족들이 식탁의 자리에서 손을 잡고 “당신의 나라가 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방글라데쉬에서 어린 나이에 다국적 기업의 공장에서 열 여섯 시간 일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한 아이의 운명이, 페루에서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어린 등에 벽돌을 수십 장 지고 날라야만 하는 한 어린이의 불행이, 에이즈에 걸린 가련한 엄마가 아기를 메마른 가슴에 안고 젖을 물리는 비참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기도할 때, 우리나라에 남과 북의 불신과 증오의 담은 허물어지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에 깨어 있기를 호소했습니다. (*설교 유투브 동영상은 아래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youtube/watch?v=26jLAkTAhD8&feature=youtu.be 예배 후, 저녁에는 노진걸 목사님의 주선으로 서정운 총장님 내외분과,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박사과정에 공부하러 온 김지철 목사님(소망교회)의 아들과 저녁식사를 나누며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첫 주간에, 그 곳의 구약학 교수와 신약학 교수로 봉사하시다가 은퇴하신 후, 금년 봄학기에 연세대에 교환교수로 가르치시다가 샌프란시스로 돌아오신 Robert & Polly Coote교수님 부부와 Berkeley에서 만나, 우리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분들이 보고 느낀 한국교회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은 일도 우리나라 교회를 제3자의 눈을 통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공부하러 온 한국 학생들과 여러가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일도 이제는 모두 즐거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4) 제가 돌아 온 11월 첫 주일에는 한 주간 늦게 종교개혁 기념 주일 성찬예배를 이형기 교수님을 모시고 드렸습니다. 이형기 교수님은 미국 Drew University에서 루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장신대 교회사 연구로 재직하시면서 칼 바르트, 디트리히 본훼퍼, 위르겐 몰트만 등을 구도자적인 자세로 연구해서 가르치시면서, 나중에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에 대한 연구, WCC 와 에큐메니즘의 활동과 신학 연구, 그리고 은퇴하시면서 “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를 개설하시고 소장 신학자들과 젊은 교수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이끌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치, 경제, 사회와 국제관계 등의 공적인 영역에서 고백적인 신학으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신앙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우리 작은 “시냇가” 교회 공동체에 오셔서 말슴을 전해 주시고 사귐을 나눠 주신 사랑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아래는 이형기 교수님의 설교 본문입니다.) 복음의 재발견 - 루터의 종교개혁 [본문: 롬 1:16-17; 3:19-31] Ⅰ. 몰락하는 중세기 (A.D. 1350-1500): 중세 말은 서방교회든 동방교회든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모스크바 중심의 동방교회를 제외하고. 그러나 중세말의 여러 개혁운동들 1. 공의회운동(conciliar movement): 교황청의 분열상황/교황청의 아비뇽 포로 2. 신비주의 운동: von Unten nach Oben 3.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 희랍-로마 문화의 부활로서 문예를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 over against the Medieval Age 4. 후기 스콜라주의 운동: 신앙과 ‘양심과 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의 도덕성에 호소하였다. 5. 위클리프와 후쓰: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호소하면서 ‘교회론’을 비판. 6. 16세기에 이르면 루터의 종교개혁 이외에. 취리히에서 츠빙글기가, 바젤에서 외코람파디우스가, 베른에서 파렐이, 그리고 제네바에서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과격파 종교개혁도 있었으며, 로마가콜릭교회의 종교개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년 10월 30일에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Ⅱ. 그러나 결정적인 종교개혁이 역사적으로 사건화한 것은, 루터가 95개 조항에 달하는 로마가톨릭 “고해성사”제도에 대한 비판의 글을 비텐베르크 성 안에 있는 대학 게시판에 게시한 시점이었습니다. 3. 로마가톨릭교회의 7개의 성사: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만찬(미사), 고해성사, 종유성사, 서품성사, 혼인성사. 루터는 이들 가운데, 특히 ‘고해성사’를 비판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촉구하였습니다. 이 ‘고해성사’의 요지는, 신부가 통회자복하고 실제 죄를 고백하는 평신도의 모든 죄책(culpa)을 용서하였으나, 이 실제 죄에 대한 가벼운 형벌(temporal punishment vs. eternal punishment)에 대하여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루터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벌을 면제받기 위하여 ‘면 벌부’를 사야한다고 지도하였습니다. 바로 이상과 같은 중세 교회의 ‘고해성사’(penance)제도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 종교개혁의 발단이었습니다. 루터는 복음 설교를 통하여 인간이 신부의 존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전에서 심히 죄인인 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1. 우리 주님이시고 우리의 대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 4:17)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 주님은 믿는 사람들의 전 생애가 회개의 생애가 되어야 할 것을 요청하신 것이다. 2. 이 말씀은 바르게 이해되는 한, 성직자들에 의하여 베풀어지는 고해성사, 곧 죄책 고백과 만족을 가리키지 않는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회해’는 당시 중세교회의 ‘고해성사’와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62. 교회의 참 보화는 영광의 거룩한 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Ⅱ. 그러나 루터는 1517년 95개 조항 발표 이전에 이미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루터가 어떤 과정으로 통하여 복음을 깨닫게 되었나에 대하여 살펴 볼 것입니다. # ‘복음의 재발견: 루터는 수도원적인 삶을 통해서 복음을 체득하였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의 수도생활 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와 공로주의 분위기에서 ‘은혜로운 하나님’(the gracious God)을 갈급해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갈망하였습니다. 그가 ‘시험’(Anfechtung)이라고 부른 것은 ‘복음’을 통해서 계시된 은혜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감추어 진 하나님’(Deus absconditus)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죄와 죽음과 흑암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었을 것입니다. 수도원의 모든 요구사항들을 모두 순종하고 준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서 샘솟는 기쁨 강 같은 평화를 경험할 수 없었다. 루터는 수도원적인 삶을 통하여 ‘양심에 대한 내적인 성찰’(an introspective conscience)을 하면 할수록 고민이 더해 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심판주로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하기를 원하지만 피할 수 없는 엄격한 심판주로만 알았다.”(W.A. 45.482; W.A. 46.46)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만 들러도 창백해 졌다.”(W.A. 40.1.298)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 존전”(coram Deo)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혹은 하나님의 심판과 그것에 따른 절망과 죽음, 나아가서 지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적인 삶 속에서 “정의로운 하나님”을 증오하였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하나님의 의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무서운 심판이라고 하는 것 이외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 엄격한 심판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실 것인가?(Table Talk 5.5247)(1540). 나는 죄인들을 벌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증오하였다. 그래서 나는 침묵 속에서의 비방이 아니라 적어도 큰 중얼거림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의분을 가졌다.(W.A. 54.185) 어떤 이가 이 싸움에 말려들 때에 그는 지옥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출구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한계를 가졌음에 틀림없는 죽을 인간의 진로가 아니라 끝을 모르는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W.A. 5.210.13) 이와 같은 하나님 경험 속에서 루터는 중세 전통이 실천해 온 ‘고해성사’에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 존전’(coram Deo)에서 양심의 불편함을 경험하였습니다. “나의 양심은 결코 나에게 확신을 줄 수 없었다. 나는 항상 의심하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것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다. 너는 통회자복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너는 그것을 너의 참회고백에서 빠트렸다.”(W.A. 40.ii.15.15)고 할 때 루터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존전(coram Deo)에서 자기 자신의 양심을 한 없이 드려다 본 것이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원장인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에게서 상담을 받았고, 그 결과 루터는 1512년에 성서와 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이상과 같은 수도원적인 삶에서의 경험을 ‘시험’(Anfechtung)이라 하였다. 그는 이렇게 토로하였다. 그는 오직 그 사람에게만 진노하신다. 하나님은 화해 없이 그에게 진노를 쏟아 내신다. 그 때엔 그만이 죄인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바르게 살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자신에게 대적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와 같은 말로 할 수 없는 탄식만이 남아 있는데, 그는 이 탄식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성령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나만을 괴롭히시는가? (W.A. 5.79) 루터는 바로 위와 같은 중세 수도원의 율법주의와 ‘감추어진 하나님’의 심판 혹은 하나님의 ‘시험’을 체험하면서 복음 안에 계시된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재발견: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그의 복음의 재발견과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는 이상과 같은 수도원적인 체험을 배경으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루프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래서 ‘시험’에 대한 교리는 루터의 신앙개념에 대한 이해를 푸는 열쇠다. 그것과 관련된 구절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루터가 신앙을 하나의 지적인 동의나 확신의 감성으로 받아들인다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이신칭의’가 단순히 여러 성서적 가르침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고 못 박았습니다. “이신칭의는 모든 종류의 성서적 가르침들 위에 군림하는 판단자이다. 그것은 모든 교회의 교리들을 보존하고 다스린다.”(W.A. 39.1.205) 그런 즉, 이상과 같은 ‘복음의 재발견: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에 대한 루터의 확고한 주장(assertion)은 성령의 크신 사역과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로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루터의 이상과 같은 복음과 그것의 수용인 ‘이신칭의’에 대한 주장은 중세 말의 모든 각성운동들의 각종 구원론과 차별화되고 독보적이며 철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터의 그와 같은 주장은 위클리프와 요한 후쓰,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그리고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의 복음 및 그것의 수용 차원인 칭의론과도 차별화되었습니다. 그런 즉, 종교개혁의 거시적인 배경은 종교개혁으로 인도하는 간접적인 화살표들의 역할은 하였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는 발화점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종교개혁은 그 당시의 외적인 배경과 여러 가지 각성운동들과 루터의 ‘복음의 재발견’의 합작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인 것으로 보입니다. # 본문해석: 로마서 1:16-17 그리고 3:19-31. # 두 종류의 의(1519) 루터는 ‘밖으로부터 온 의’(iustitia aliena)와 ‘우리 자신의 의’(iustitia propria)를 주장합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입니다. 그것은 “타자의 의, 곧 밖으로부터 온 의”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문화활동이나 직업 활동을 통해서 성취된 그 어떤 의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그 어떤 가장 고상한 도덕적, 종교적 성취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세계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롬 1:17, 고전 1:30, 요 11:25-26) 루터에 의하면,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세례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혼을 경험하는 바, 여기에서 모든 부정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모든 영적인 것이 우리게 전가되는 ‘즐거운 교환’(happy exchange)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밖으로부터 온 의’와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보십시다. “첫 번째는 외래적인 의(義)(iustitia aliena = strange righteousness)로서 밖으로부터 온 다른 분(another)의 의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서 고린도전서 1:3에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느니라.’라고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두 번째 의’란 무엇인가? 루터에 따르면 이 두 번째 의는 “첫 번째 의의 소산”으로서 이신칭의 받은 혹은 구원받은 사람 혹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첫 번째 의’에 대한 반응이다. 루터는 이 ‘우리 자신의 의’(iustitia propria)는 ‘밖으로부터 온 의’(iustitia aliena)에 대한 반응적 협조에서 결과하는 것으로 본다. 즉, 방금 전에 언급한, 실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 관계에 들어간 사람이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의’는 ‘성화’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의는 우리 자신의 의입니다. 하지만 우리 혼자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밖으로부터 온 의가 그것을 성취케 합니다. 그가 말하는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해서 읽어보자. “두 번째 종류의 의는 우리 자신의 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홀로 그것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래적인 첫 번째 의와 더불어 우리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두 번째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로 육을 죽이고 자기와 관련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운데 선한 행실을 하면서 유익하게 보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 즉. 본 저서에서 첫 번째 의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물 혹은 은혜(donum = Gabe = Indikativ)이시고 두 번째 의에 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 혹은 과제(exemplum = Aufgabe = Imperativ)이십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두 종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를 위해서’(pro nobis) 위해서 일어났고, 이것이 성령 역사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들어온다.’(in nobis)는 개신교 주류의 구원론적인 초석이라고 생각됩니다. # 루터가 칼빈에게 준 영향 우리는 특히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복음’의 객관성과 보편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복음의 객관성과 보편성이란 우리 인간이 믿음으로 그것을 수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죄와 죽음과 흑암의 권세를 완전히 전가시키시어, 모든 인류의 구원가능성을 열어 놓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행복한 교환”(happy exchange = foehlicher Wechsel)입니다. 그리하여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겐 그 모든 부정성(the Negative =죄와 죽음과 흑암의 권세)이 주님에게서 극복된 것입니다. 이는 루터의 iustitia aliena와 쌍을 이루는 opus alienum일 것이다. 칼빈은 4권으로 구성된 그의 최종판 기독교 강요(1559)에서 제Ⅱ권에선 정통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인 복음을 제시하는 바, 이는 우리 인간이 믿음으로 수용하기 이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칼빈이 이신칭의를 논하는 것은 성령론 부분에서 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최종판 강요 제Ⅲ권 초두에서 저 복음(예수 그리스도)과 우리 인간을 연합시키시는 분은 다른 분이 아닌 성령이시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 그 제목을 “1. 성령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끈이 되심”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에게 베푸신 축복들, 곧 그가 자기를 위해 쓰시기 위함이 아니라,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풍성케하시기 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그 축복들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고 그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당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또한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또한 우리 속에 거하셔야만 비로소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축복들을 우리와 함께 나누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고 또한 그가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Inst.Ⅲ.1) 루터의 ‘이신칭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칼빈 역시 인간의 구원은 오직 ‘복음’에 대한 수용인 ‘이신칭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루터와 칼빈 모두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이신칭의’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였습니다. 칼빈 역시 루터처럼 이신칭의(the justification the sinner)와 성화를 엄격히 구별하면서도 이 둘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였고, 나아가서 칼빈은 “이신칭의 받은 사람의 행위들에 대한 칭의”(the justification of the works of the justified)를 루터보다 더 강조하였습니다. 칼빈의 최종판 기독교 강요(1559)의 제2권을 복음이라고 한다면 제3권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성령론입니다. 제2권의 복음이해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3중직에 의한 화해사역을 말하고 있고, 제3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방법”(the Way in which We Receive the Grace of Christ)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칼빈은 이 제3권에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 사이에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 cum Jesu Christo)이 일어난다고 보고, 이 신비적인 연합이 이신칭의와 성화의 근거라고 하였습니다(Ⅲ. ⅰ. 1). 즉,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먼저 일어나야, 인간이 복음(제2권)에 대해서 성령 역사로 신앙과 순종(제3권)으로 응답할 수 있고, 이것의 결과가 다름 아닌 ‘이신칭의와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니젤과 방달). 이신칭의와 성화를 이중적인 은혜라고 말하는 칼빈의 구원론은 루터보다 성화를 더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는 제3권에서 칭의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성화(=중생)에 대해서 논했고, 제2권 기독론(Ⅱ. ⅶ. 12)에서 율법의 제3 사용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복음과 율법”(Ⅱ. ⅷ. 13)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 칼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출애굽시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죽음에 노예 되었던 인류를 출애굽시켰다고 하는 이야기가 십계명의 머릿 말(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의 의미내용이라고 보고, 이 은혜야말로 나머지 계명들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Inst. Ⅱ. ⅶ). 바로 이런 뜻에서 칼빈은 “복음과 율법”을 더 강조하였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 이신칭의 얻은 사람은 구약의 예언서들과 신약의 산상수훈과 사도들의 훈령을 따라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이신칭의 받은 사람의 “성화” 그 자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으 아니라고 주장합니다(Ⅲ. ⅹⅳ. 18, 19, 20, 21). 그럴 경우에 우리는 이신칭의 받은 사람이 하나님 존전 에서 역시 심히 부족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끝으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의 내용구조에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구원론의 총화를 발견한다. 즉, 이 교리문답은 3가지 내용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Von des Menschen Elend)이고, 둘째는 이 인간이 복음을 믿어서 이신칭의를 받으며(Von des Menschen Erloesung), 셋째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Von der Dankbarkeit)고 하는 것이다. 첫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둘째는 복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여 이신칭의를 얻은 사람이 사도신경의 모든 신앙항목들을 믿어야 할 것을, 셋째는 회개에 이어서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풀이하고 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기쁘고 감사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double Love 이중적인 사랑으로 요약되는 십계명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데, 늘 기도를 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논리이다. 결론 #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 복음과 성경: 종교개혁의 실질적인 원리는 복음이었고, 그것의 형식적인 원리는 성경이었으니, ‘복음’을 빼놓은 성경이해는 ‘앙꼬 없는 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흐르고 있는 구속사의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Law and Gospel의 구별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Gospel and Law(as Gods Will) 그리고 simul iustua et peccator # two Kingdoms, 그러나 세상에 대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책임 # Heidelberg Catechism: Von des Menschen Elend/Von des Menschen Erloesung/Von der Dankbarkeit(double Love로 요약되는 십계명 해석 +the Lords Prayer 해석) 오늘의 상황과 관련하여 1.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화 - 빈부의 격차로 인한 인간의 공동체 파괴 - 환경파괴로 이한 창조 공동체 파고 2. 다문화 다종교의 상황에서 공동체 추구 남북한의 화해와 정의로운 평회체제 구축을 통한 공동체추구 등에 있어서 Law and Gospel: 우리들 자신과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Gospel and Law: ‘복음’(출애급)을 통한 구원, 그러나 나아가서 예언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유엔헌장을 비롯하여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Two Kingdoms: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왕국’을 이분화한 나머지, 교회를 이 세상의 공적 책임수행으로부터 퇴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인류 사회’와 ‘창조세계’를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이델바르크 교리문답’의 구조에서 루터와 칼빈이 추구하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5) 제가 미국에 있을 동안 강남훈 교수 장인 장례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하나님의 품에 맡긴 정해랑 선생님께 우리 주님께서 그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그리스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의 소망을 굳건히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또한 지난 주일 (10일), 조건호 장로님의 임직예배가 오후 3시 30분, 소망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새로 임직된 조건호 장로님이 더욱 겸허한 용기 가운데, 자신이 처한 기득계층의 사적인 기독교를 극복하고 우리의 현실과 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더욱 간절함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드리면서, 장로 임직에 따뜻한 축하를 드립니다. (6) 귀국한 다음 월요(4일) 우리 “시냇가” 교회가 속한 “서울 서노회”가 계획한 1박2일의 WCC총회 참관 프로그램에 동참했습니다. 다음 100년 후에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서울서노회가 5일에는 부산 관광으로 프로그램을 채워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도착한 4일 오후에는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고 단지 “마당”에 펼쳐진 부스들만 방문할 수 있어 WCC의 보다 중요한 일치, 선교, 정의, 평화 문서들의 신학적 토론과정을 알 수도 없었고 참여할 수도 없어서 답답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번 부산에서 열린 제 10차 총회에서 발표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 등은 (https://ext.oikoumene.org/assembly)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랫만에 교회 소식을 전합니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모두 건강을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시냇가” 교회 공동체와 부족한 저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은규 목사 드림.
Posted on: Tue, 12 Nov 2013 12:2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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