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홍삼이가 에게 보낸 편지 - TopicsExpress



          

문홍삼이가 에게 보낸 편지 (참조용) 천진도사(kopp89) cafe.naver/moongaman/210 문재인님에게 안녕하십니까? 2012년 12월! 역사의 새로운 갈림길이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 인류의 위기이자 멋진 도약의 기회가 될 2012년!지구의 자기장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에너지의 패턴이 크게 전환되는 격변의 시기에우리 국민이 또다시 을 하지 않고,흩어진 민심(民心 = 天心)을 통합하고 현명하게 결집하여 을 지혜롭게 선택하기를 소망합니다. 온 겨레의 소망이자 온 인류의 소망인 을 우리 모두에게 인도하여 실현시켜줄 은 누구일까요? 저는 1975년 11월 어느 날.박정희 대통령이 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을 동반하고 특전사령부를 방문하던 날, 저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에서 교육을 받다가 막타워 인근의 소규모 에서 를 외치며 챗바퀴를 도는 훈련 사병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1공수여단장 준장이 부대를 인솔하여 특전사령부 연병장에 구보로 입장하던 장면을 목격한 기억이 납니다. 제가 목격한 1공수여단 병력들의 모습은 매우 씩씩하고 늠름했었는데요, 문재인님도 어쩌면 그날의 현장에 완전군장 차림으로 입장하고 계셨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1987년 9월, 10월, 11월, 12월....운명적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와 저의 인연이 교묘하게 전개되었습니다.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그리고 노태우!네 후보의 을 모두 저 혼자 독점하여 집필하는 기묘한 인연이 있었는데,저는 어려서부터 줄기차게 김대중 후보의 지지자였으나, 만화 잡지사의 청탁과 인연에 따라서 네 후보의 홍보물 스토리를 본의 아니게 모두 제가 집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저의 본명 을 네이버 검색으로 검색해보시면, 저의 이력과 사생활에 관한 사항은 물론이고, 제가 만든 다양한 에 관한 사진 자료들도 더러 찾을 수 있습니다. 는 약 100만 권~120만 권 정도를 인쇄하였고,, 두 종류는 15만 부와 5000부 정도를 인쇄-배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홍보만화 [연희동 보통사람], [보통사람 노태우]는 각각 250만부를 인쇄 배포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와 2+2 인의 만화가는 페이지 당 1만원~ 3만원의 미미한 원고료를 받고 공평하게 4후보의 만화일대기 스토리와 콘티를 짜고 제각기 다른 내용의 홍보 만화를 만들어 에 연재하였는데, 그 만화를 소책자로 재인쇄하여 홍보책자로 납품한 회사는 제법 큰돈을 벌었습니다. 저는 4후보를 제각기 으로 삼아서 &를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자금을 많이 투입하여 홍보만화소책자를 엄청나게 많이 인쇄-배포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그 바람에 저는 [어용 정치만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호남 출신인 친지들로부터 숱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양김의 단일화만 되었더라도 결과는 달라졌겠지만, 미국 CIA의 개입으로 가 불가능했었다는 후문을 훗날에 [민주화청년 연합회] 회장님으로부터 들은 바 있습니다. 후보를 사퇴하면 암살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던 김대중 후보는 낙선의 결과를 예상하고도 죽음이 두려워서 단일화를 결행하지 못했으며, 어리석은 김영삼 후보는 자신이 당선될 것으로 확신했다더군요. 1988년 올림픽 직전에 으로 재임 중이던 저는 신통방통한 도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그 분의 끈질긴 권유로 저는 과 를 집필하였고,그것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저의 권유와는 다르게 전개되었지만, 한국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노태우 대통령이 얼마 후에 감행한 연설문의 초안을 제가 작성한 것입니다. 제가 도인의 도움을 받아서 구상하고 집필하여 전달한 [4당 합당 정치 개혁안]은 불필요한 정쟁을 마감하고 국민대화합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었음에도, 권력욕을 버리지 못한 노태우 대통령의 미지근한 개혁의지, 그리고 김대중 총재를 왕따시키려던 김영삼 총재의 아집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민주화청년연합회(연청) 회장님으로부터 후일담을 자세히 전해 들어서 [4당 합당의 개혁이 좌절된 내막]을 잘 알고 있습니다. 노통은 제가 제안한 개혁안 그대로 4당 합당을 추진하였고 김대중 총재가 맨 먼저 적극 찬동하였는데, 김영삼 총재의 반대로 4당 합당은 무산되었고, 김영삼 총재의 아집과 노태우의 꼼수로 평민당만 왕따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대화합]의 취지에 찬성하여, 맨 먼저 [4당 합당]에 찬동한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을 오히려 제외해버리고, [3당 합당]- 야합으로 실현되는 바람에, [ 민주주의의 후퇴와], [지역갈등의 심화]를 초래하는 역사적인 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저는 여전히 구도자의 길을 모색하던 중에...(광주서중일고 48회 동창생 친구의 도움으로) 1995년 11월 19일에 [一切唯心造]의 비밀을 확연히 깨우쳤습니다. 아울러 만물의 근원이자 이 우주 - 天地人의 근원이 바로 조물주이기에 [人乃天] 사상과 [天上天下唯我獨尊]의 진리가 동일한 해답인 것을 깨우쳤습니다. 비로소 를 체득하여 미래를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였던 1995년 11월 19일 이후, 저는 수시로 예언을 남발하는 철부지 가 되었는데요, 1996년 1월 초에는 묘한 인연으로 예언자의 역할을 맡아, MBC 뉴스팀장으로 재직 중이던 정동영님과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 1996년 1월 2일 오후 / 만나서 미래를 예언한 장소는 명동의 횟집이었습니다. ) 세 번의 만남에서 매우 건방진 태도로 남발했던 확신에 찬 저의 예언들! 당시에는 선무당 수준이었던 저의 예언들은 용케도 훗날에 100% 적중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은 그 당시의 제 모습을 반추하게 합니다. 저의 기묘한 연극 - 용기가 부족했던 정동영님을 호통치며 자존심을 크게 자극한 선무당 역할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정동영 님은 아직도 본인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흔들림 없이 으로 활약하고 계실 텐데... 저의 건방진 예언과 호통 연극의 허물을 돌이켜 보면, 몹시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우연처럼 보이는 인연으로 인한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의 변화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기묘합니다.정동영 님과 저의 인연은 더욱 그러합니다. 당시에 남발하고 다니던 [천기누설 예언] 탓이었을까요? 저는 1996년 10월 26일에 공교롭게도 잠시 정신병원에 갇히는 화를 당했고, 그 이후로는 건방진 예언을 자중하였으며, 제법 겸손해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취임한 직후였던 1998년 2월 27일 오후 4시경.저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세검정 근처)에 소재한 4평 정도의 작은 음식점에서 노무현님과 단둘이서 우연히 조우하였고, 약 20분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전날 밤에 다급하게 열차편으로 상경하신 노무현님이 김대중 대통령 취임과 함께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이종찬님으로부터 종로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인수인계 받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노무현님이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리라는 예감이 매우 강하게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래서,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약 20분 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날 저녁 술좌석에서부터 저는 [차기 대통령은 노무현!]이라고 선언하고,그 이후로도 줄기차게 확신에 찬 예언을 떠들고 다녔는데, 많은 친지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은 저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였습니다. [삶의 인연 법칙]으로 분석해보자면, 평범한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일종의 [나비 효과]가 결국에는 점점 확산되어서 이라는 열매를 거둔 셈이지요.제가 정치입문을 인도하고 조언했던 정동영 님이 2002년에 [국민경선제]를 주장하여 도입-반영된 덕택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노무현님이 초반부터 돌풍을 일으켜 예상 밖의 주인공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에는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무명의 건방진 예언자였던 저의 강한 의지가 인연과 파장을 만들고, 신비로운 운명의 프로그램에 편승하여 이 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조타수 역할을 했음을 자각하며, 스스로 대견해 했지만, 저의 삶은 점점 로 추락을 거듭했습니다. 2007년. 정동영-손학규 두 분의 경선 대결에서 초심을 잃고 저를 모른 척 외면하는 정동영 후보에게 실망하여 손학규 후보 편에 서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손후보를 돕고자 (동창생 백계문 친구와 함께) 손학규 캠프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얄밉지만 어쩔 수 없이 정동영 후보를 다시 돕기로 결심했습니다.정동영 후보가 이명박 후보와 맞선 대선을 앞두고 저는 약 1년 동안 열심히 정동영 후보를 쫓아다니며 열렬한 지지 활동을 하였습니다.그러나 정동영 후보는 선의의 의도로 무보수로 봉사하고 돕고자 접근하는 저를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번번이 회피하더군요. 이명박 후보를 단숨에 무너뜨릴 비책과 다양한 선거공약을 구상하였지만, 저를 만나주지 않으므로 직접 전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선거일 직전 명동의 마지막 유세를 구경하면서 유세장 청중의 열광적 지지를 확인하면서도 저는 운명적인 패배를 확실하게 예감하였습니다. 유세가 끝나고 지지자들이 [정동영!]을 연호하며 후보를 따라서 유세장을 빠져나간 후, 저는 혼자서 쓸쓸하게 퇴장하여 귀가하던 손학규님의 뒤를 따라가다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이미 틀렸으므로, 패배한 야당은 손학규님이 재건해야 되겠습니다.]라는 인사를 전하려고 접근했는데, 흠칫! 놀라시더군요. 1996년 1월, 정동영 앵커를 만난 직후에 여의도 국회 앞의 어느 식당에서 손학규 장관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저의 동창생 김학주 민주당 전문위원과 동행한) 저와 우연히 대면하게 되었으며, 잠시 대화한 후 저와 동행인들의 식대와 술값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에 재직 중이던 손학규님이 먼저 나가시면서 지불하신 적이 있었지만, 약 12년 만에 재회한 손학규님이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냥 위로의 인사만 하고 헤어졌었지요. 저의 예감대로, 정동영 후보는 2007년 대선 직전까지도 를 깨닫지 못하더니, 대선에서 큰 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의 총선에서도 정동영 님은, 접근하는 저를 늘 잽싸게 피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저의 중고교 동창생 백계문(서울대 법대 73학번)씨가 지구당을 이끌고 있던 에 하필 정동영 님이 뒤늦게서야 출마를 검토할 적에, 저는 측근을 통해 매우 간절하게 만류를 하였습니다만, 저의 의견이 전달되지 못하였는지... [동작 을] 출마를 강행하여 저의 예감대로 쓴잔을 마셨습니다. ........................................................................................ ( 자,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2012년 12월의 대통령 선거! 앞으로 약 10개월 후에 닥쳐 올 미래는 아직 그 결과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국민의 의식과 행동 여하에 따라서 여러 갈래의 미래가 전개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북한 의 연착륙은 현재 상황만으로 보기에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고, 김정은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 뻔하고, 북한 주민의 의식 변화 속도는 가속도가 붙게 되므로 어느 날 갑자기 체제가 와르르 무너질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북한 주민의 에 따라서 그 시기가 앞당겨 질 수도 있으므로, 대선을 치르기도 전에 북한의 체제가 조기에 붕괴되는 시나리오가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리미리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금년에는 후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권의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몇몇 분들 중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4인의 단합이 관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재인, 안철수, 손학규, 정동영 - 이 네 분이 우리 겨레의 미래를 선도하셔야 합니다. 저의 예감이 맞다면, 안철수 님은 문재인 님을 지지하면서 후일을 도모하는 선택을 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손학규님과 정동영님도 결국에는 현명한 선택을 하시리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제법 정확하게 미래를 내다보지만, 타인의 주목은 받지 못하는 인 저는, 문재인님이 2012년 격변기의 이 나라 지도자로서 최적임자라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도 문재인 님과 나머지 세 분 중에 한 분이 맡아야만 우리 민족의 장래가 더욱 밝아질 것으로 저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4월 총선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신 후,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와 통일조국의 미래를 선도하는 인도자로 우뚝 서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지역감정, 지역감정에 편승한 안일한 !갈수록 심화되는 , 를 조속히 치유하고 통합하여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갈등을 말끔하게 마무리하고, 지혜로운 [햇볕정책]과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에 대한 공포를 잠재우고 평화적 남북통일의 장대한 전진을 견인하는 지도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디 우리 남평 문씨 시조이신 文多省 조상님의 지혜를 이어받으셔서 후세에 길이 추앙받는 [큰바위 얼굴]이 되실 날을 저는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2012년 2월 2일 용산구 효창동 효창원로 59길 17호 문 홍 삼 올림 ( 이메일 주소 : dosamoon@gmail ) .....
Posted on: Thu, 08 Aug 2013 04:3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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