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청년 이승장 목사 [251호 오늘 복상이 - TopicsExpress



          

만년 청년 이승장 목사 [251호 오늘 복상이 있기까지] 전 발행인 이승장 목사 인터뷰 [251호] 2011년 08월 24일 (수) 18:49:19 박총 [email protected] 캠퍼스 학생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예수마을교회 이승장 목사. 청년을 일깨우기 위해 창간했던 과도 각별한 사이를 맺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복상이 재정 문제로 힘겨웠던 2003년 7월부터 발행인을 맡아 와의 통합 때까지 고난의 한 시기를 버티게 해 주었다. 그를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70세 생일이었다. 축하의 자리에서 청년들이 진심어린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는 걸 보았다. 그 훈훈한 자리에서 그야말로 ‘예수 마을을 지키는 만년 청년’임을 절감했다. ▲ 이승장 목사는 복상이 재정 문제로 힘겨웠던 2003년 7월부터 발행인을 맡아 와의 통합 때까지 고난의 한 시기를 버티게 해 주었다.ⓒ복음과상황 박총 박총(이하 박) / 생신 축하의 자리에서 청년들이 건네는 축하와 감사의 말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목사님의 칠십 평생을 검증해 주는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승장(이하 이) / UBF 간사 시절부터 청년들을 단체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한 사람이 우주보다 귀하다는 신념을 갖고 스스로 점검하며 목회를 했습니다. 잘못과 실수도 많았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런 목회철학의 열매가 아닌가 싶습니다. 박 / 예수마을교회를 보며 늘 감사한 점은 교회를 양적으로 키우려는 욕심을 좇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 김회권 목사가 그럽니다. 교회 건물만 있어도 5백 명은 모일 거라고요.(웃음) 박 / 어떻게 어려운 시기에 의 발행인을 맡게 되셨나요. 이 / 실은 오래전부터 문서 사역을 했습니다. UBF 간사 시절 회지를 만들었고, 한국 최초의 큐티지인 편집인을 맡기도 했습니다. ESF에서도 지를 만들었고요. 지금은 제자라 하기엔 좀 그렇지만 김호열, 김회권 두 후배가 당시 복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고, 복음주의권에서 이런 잡지는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복상 자문위원인가, 고문위원인가를 맡았고 김호열 형제의 부탁으로 칼럼을 쓰기도 했지요. 그런데 잡지가 어렵다, 이러다 폐간되겠다 하는 얘기가 들리고, 강경민 목사와 이문식 목사가 찾아와서 발행인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홍정길 목사도 이승장 목사가 적임이라고 말했다고 하면서요.(웃음) 그래서 맡게 됐지요. 그런데 발행인이라고 이름만 걸어놓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비록 제가 돈 모으는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발행인이 월 1백만 원은 내놓아야 되겠다 싶어서 아들 이사무엘 집사의 도움을 받아 나름 기여를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발행인을 맡았던 1년간 복상의 재정 위기가 타개되지 않았습니다. 섬기는 동안 잘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 학복협, 코스타 두 단체의 대표로 있으면서 복상에 전념하지 못한 것도 있지요. 서재석 부장님과 황재홍 간사님이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하는 등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고통이 컸습니다. 지금은 훌륭한 후배 발행인, 후배 이사장을 모시게 되어 감사하지요. 박 / 어떤 면에선 어려운 시기에 발행인으로 섬긴 것보다 복상의 신학적 기초가 된 로잔언약을 한국교회에 소개한 것이 더 큰 공로가 아닌가 합니다. 이 / 예전에 폴 리틀(Paul Little)이라는 로잔 위원 중 한 분이 한국에 왔을 때 UBF가 제일 큰 선교단체라서 제가 그 분을 모시고 다녔는데, 그때 처음으로 로잔에 대해 들었습니다. UBF 간사라서 누린 특권이었죠. 이창우라는 UBF 지도자가 로잔대회에 다녀오면서 로잔 책자를 갖고 왔고요. 사실 그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그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로잔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거예요. ESF에서 낸 라는 잡지가 있는데 거기에 ‘복음주의와 사회윤리’라는 논문을 싣고 부록으로 로잔언약을 직접 번역, 소개했지요. 전두환 시대라 주위에서는 사회윤리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게 위험하지 않으냐고 말을 했는데, 제가 독재 정부의 사찰 대상이 될 만큼 민주화 투쟁을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공부하고 돌아와서 이것만큼은 소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뒤에 이만열 장로님이 영국에 오셔서 저희 집에 묵으셨는데 그때 로잔에 대한 책자를 보여드리자 정말 중요한 문서라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박 / 로잔언약을 접하기 전부터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에 관심이 있으셨는지요. 이 /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한국 보수교단이 제대로 복음주의가 못 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생 사역을 하면서도 ‘왜 천당만 강조할까.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한데’라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5, 60년대 어거스틴의 , 아 켐피스의 등을 읽으며 경건의 삶을 다지기도 했지만 학부 때 본 회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함석헌 등의 저작을 읽으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 분이 인생의 방향을 잡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죠. 박 / 대형교회 목회자들에 비해 덜 알려지긴 했지만, 한국 복음주의운동에서 대표성을 가지신 분이라면 목사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이 / 과찬입니다. 사실 저는 제가 한 일이나 인격에 비해 과대평가됐습니다. 그래서 자꾸 숨으려고 했지요. 김회권 목사는 그것을 은닉적 영성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상투적인 표현일지도 모르나 제가 한 것이 있다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바울의 말마따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를 붙잡아 준 것은 아내 정금자입니다. 금자 씨가 유명해져서 정마리아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 줬지요.(웃음) 저는 아내를 존경합니다. 박 / 지난 달 미국 코스타에서 한 학생이 누구를 제일 존경하느냐고 묻기에 서슴없이 ‘안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웃음) 저도 세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을 함께 통과하면서 ‘안해’와 동지적 연대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 / 과거에 우리 딸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다가 9살에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있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아내가 기도를 배우고 영적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기도와 상담에 은사가 있어서 동역해 왔지요. 제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속에 불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 선교단체에서 설교를 하는데 누가 늦게 왔습니다. 그게 그렇게 화가 나서 설교하다 말고, “너 같은 놈 때문에 안 된다”며 수첩을 집어 던지기도 했지요. 그런 식으로 제가 저지르는 잘못을 아내가 수습했어요. 아내와 저는 이제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지라고 할까요. 배우자일 뿐 아니라 동역자로 살아 왔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찬송하고 말씀 나누고 기도하고 그렇게 가정 제단을 함께 쌓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부인이 너무 나서는 게 아니냐며 오해하기도 하시는데 애초에 저희는 사역의 동반자로서 결혼했습니다. 물론 로맨스도 있었지만 동역자로서 한몸을 이룬 면이 강했지요. 아들 하나는 선교사, 하나는 목회자가 되길 바랐는데 둘 다 돈 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웃음) 자녀들도 동역자로 동참하고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제가 노년에 복을 많이 받았지요. 박 / 내년이 정년 퇴임이신데 여생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 ⓒ복음과상황 박총 이 / 청년들이 더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제자 공동체라고 할까요. 작은 교회를 개척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제자 공동체가 연합해서 통일 한국 시대를 준비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워드 슈나이더의 를 보면 모든 생물체는 적정한 크기(size)가 있다고 하는데 한국교회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를 추구합니다. 영국교회는 200명 넘어가면 분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메가 처치를 지향하는 미국과는 다르지요.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하시면 청년과 청년 사역자를 위한 글도 쓰고, 그들이 휴식할 수 있게 해 주고, 상담하고 영성을 다질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말년에 추해진다는 뜻의 ‘노추’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성공, 섹스, 명예 등에 붙들리면 안 되겠지요. 로이드 존스가 명예에서 완전히 자유롭기가 죽는 날까지 불가능하다고 했을 정도로 명예욕은 질긴 것 같습니다. 근데 유명이란 말이 뭡니까. 이름이 있다는 것인데, 하늘나라에 이름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근데 이게 혼자 힘으론 어렵습니다. 배우자, 가족, 공동체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마 다니엘도 혼자서는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세 친구 함께 있었기에 바벨론 문화에 함몰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 동지를 얻는 데 힘써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한평생 유지하기는 더 힘들지요. 지난날, 저와 아내는 UBF에서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헌금하고 헌신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라는 분의 집에 가 보니 당시 개에게 치즈를 주고 있고, 로잔 대회에 다녀오면서 그 귀하다는 스위스 시계 수 십 개를 사서 딸의 선생님들에게 선물로 돌리고 그랬지요. 그런 걸 봐서 그런지 지도자로 대접받는 게 두렵습니다. 학복협 차로 세피아만 타도 참 감사했는데 그 차를 바꾸게 되면서 저는 같은 급인 엘란트라로 하자고 했어요. 근데 김동호 목사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며 소나타급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로체로 바꾸었습니다. (웃음) 한국교회가 미국 기독교 흉내를 내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큰 교회 목사는 큰 차도 모자라 기사에, 고급 호텔에 모여 음식을 먹고 (목사들이 거기에서 모이면 저도 가서 먹는 사람이라 이런 말 할 자격이 없습니다만), ‘자발적’인 가난이 필요한 시대에 ‘재벌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 / 복상에 바라는 바나 쓴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 / 복상을 만드는 이들이 문서 사역자로서의 소명감, 자부심을 갖고 정진해 주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 역사는 문서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좋은 필진을 발굴하고 글을 쓰고픈 맘을 불러일으키는 잡지가 되길 바랍니다. 복상은 성격상 대중화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다른 잡지 흉내를 내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교신 선생님이 을 낼 때 당시 인구를 고려한다고 해도 채 2백 부가 되지 않았거든요. 다수를 즐겁게 하려고 하기보다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따르는 이들을 위한 글이 많이 실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독자 관리를 더 잘 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활발했던 독자 모임이나 복상 읽기 모임이 곳곳에 생겨나도록 한다면 좋겠습니다.
Posted on: Fri, 30 Aug 2013 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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