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이 1712년 오랄총관 목극등이를 시켜 일방적인 - TopicsExpress



          

청이 1712년 오랄총관 목극등이를 시켜 일방적인 석비를 세울 때 세우는 과정때 앞.뒤 역사적 기록을 빼고더라도 목극등이의 실수인지 그 지역의 지명을 몰라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의 지시대로 세운 곳이 바로 토문강 시작되는 지금의 오도백하인 것은 역사적.지리적 사실 이기도 합니다. 국경을 세우고자 청의 책임자가 파견되어 현장에서 국경비를 세우는 당사자인 목극등이가 단순한 판단 착오일지라도 그 원인 제공은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청에 있기에 그 당시 영토 분쟁이 일어난겁니다. gando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Korean people moved to the Gando area where they settled down to plow and cultivate the deserted land. 19세기 후반 한국민들은 간도지방으로 이주하여 황폐하고 버려진 땅을 갈고 경작하며 정착하였습니다. When the dispute over Gando broke out, Qing (China) called upon the Korean people to leave the area. 간도지역을 놓고 논란(분쟁)이 생겨나자 청(중국)국은 한국민들이 간도를 떠나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However, the Daehan Empire firmly insisted that Gando was part of its territory, pointing out that the Tomun river was part of the Songhua river of Manchuria, not the Duman river as Qing insisted. 그러나 대한제국은 토문강이 청국이 주장하는 두만강이 아니라 만주지방 송화강의 일부인 토문강임을 지적하면서 간도지역은 대한제국의 일부임을 분명히 주장하였습니다. Meanwhile, the Korean government dispatched officials to Gando to govern and to provide protection for its citizens. 한편으로 대한제국정부는 관리를 파견하여 국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였습니다. However, Japan recognized Qing’s territorial rights over Gando in return for obtaining Qing’s permission to lay branch rail lines in Manchuria, according to the Gando Treaty concluded between the two sides. 그러나 일본은 만주지역에 대한 철도부설권을 얻는 반대급부로 간도에 대한 영토권을 청국과의 간도조약(협약)을 맺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However, since King Gojong had declared the Treaty of 1905 between Japan and the Daehan empire invalid, the Gando Treaty based on the 1905 treaty was also invalid. 그러나, 고종황제가 대한제국과 일본간의 1905년도 한일조약은 효력이 없음을 선언하였기 때문에,1905한일조약에 바탕한 간도조약(협약) 또한 무효한 것이었습니다. 추신: 위 글과 동영상은 국회 홈페이지에서 한국사 중 간도관련부분을 촬영하여 옮긴 것이니 저작권은 국회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국회에서 이 동영상을 제작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동영상 중 서해를 황해로 기입한 것은 약간 옥에 티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국회 홈페이지에서도 간도에 관심을 가져주신만큼 온 국민이 간도를 우리 품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Posted on: Thu, 07 Aug 2014 18:05:3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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