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II 마태오복음 해설 137 “37 - TopicsExpress



          

슬픈 예수 II 마태오복음 해설 137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내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38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 3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고 너희 입으로 찬양할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태오 23,37-39) 그리스어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는(루가 10,41; 22,31; 사도행전 9,4) 드물지만 유다교 문헌에는 아주 많다. 예언자를 죽이는 사회가 어디 이스라엘 뿐이랴. 예언자는 어느 사회나 조직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교회가 박해하던 사람이 인류의 영웅으로 부활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그 예언자의 목록에 돌로 처형당한 스테파노 사건을 마태오는 37절에서 암시하고 있는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가톨릭교회에서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은 스페파노 순교자 축일이다. 예수 오시자마자 그리스도교는 순교를 기억하라는 뜻이다. 예수를 이스라엘 예언자 계보에 포함시키고 예수의 처형될 운명을 알려주려는 마태오다. 새끼를 보호하는 새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비유다.(신명기 32,11; 이사야 31,5; 시편 36,8)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은 Schekhina(하느님의 날개)로 이끌려졌다고 말해졌다. 37절에서 orvis는 암탉 또는 수탉을 가리킨다. Luther는 암탉으로 번역하였다. 37절에서 하느님 대신 예수를 마태오는 등장시킨다. 37절 내 자녀는 예루살렘 시민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 38절 oikos는 성전이나 도시를 가리킬 수 있다. 어느 것을 가리키든 상관없다고 Schweizer는 말하지만 성전을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38절은 내용상 에제키엘 예언서 9-11장와 가장 가깝다. ‘너희’ 성전이란 표현은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교와 거리가 멀어졌음을 나타낸다. 38절을 읽는 유다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분노와 적개심에 몹시 불쾌할 것이다. 38절은 일종의 사후에언事後豫言(ex eventu)이다. 사건 발생 이전에 예측하는 예언이 있고, 사건이 생긴 후 비로소 예언을 꾸며서 지난 사건을 예측한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후 마태오는 마치 예수가 이미 성전파괴를 예언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는 예언가가 아니라 예언자다. 성서의 예언자는 미래 사건을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를 하느님의 눈으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점술가와 성서의 예언자는 하는 일이 아주 다르다. 예수를 기쁘게 맞이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임을 39절은 암시한다. 39절 앞부분은 예루살렘 성전 순례자들이 부르던 시편 118장에서 따온 것이다.(마태오 24,1-) 유다인 대부분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태오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숨김없이 나타난다. 그러나 놀랍게도 38절은 유다인의 구원을 암시하는 것 같다. 유다인의 구원을 확신한 바울처럼 마태오도 그러했는가.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완고하지만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고 따라서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되리라.”(로마서 11,26) 본문 해석상 가장 중요한 문제는 37절에서 1인칭 단수로 나타난 ‘나’가 누구를 가리키느냐다. 역사의 예수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수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였다. 그런 예수가 ‘몇 번이나’를 말하기는 자연스럽지 않다. 겨우 3년도 안되는 공식활동 중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겨우 며칠 머물렀다는 것이 대부분 성서학자들의 견해다. 예수가 왜 예루살렘에서 오래도록 활동하지 않았을까. 수수께끼다. 37절 ‘나’는 부활한 예수 이름으로 선교하던 방랑설교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의 입을 빌어 방랑설교자가 말하고 있다. 유다인 선교에 대한 방랑설교자의 실망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다. 바리사이파를 중심으로 하는 유다교에게 박해받던 마태오 공동체는 자신을 지켜야 했다. 유다교에서 추방된 마태오 공동체는 자신을 보호하고 구분하기 위해 유다교를 보는 시각이 과격해졌다. 바리사이파에 대한 매우 그릇되고 편파적인 모습이 마태오복음에 소개된 이유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마태오의 저주는 1,900년전에 생겼다. 마태오가 예고한 세상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유다인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유다교에 대한 마태오 공동체의 적개심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그리스도교는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교를 보는 정서적 분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더구나 성서신학의 연구성과도 상당히 쌓여 있다. 그리스도교는 차분한 시각에서 유다교를 보아야 한다. 유다교를 보던 마태오 공동체의 시각이 지나쳤다는 점도 깨달을 수 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도 유다교에 대한 마태오의 저주는 적절하지 않다. 설교자들은 이런 점을 신자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유다교를 보는 설교자들의 눈이 타당한지 먼저 검토되어야 하겠다. 무식함이 잘못 가르치는 알리바이로 악용될 수는 없다. 예수가 하지 않은 저주를 마태오는 하였다. 예수의 의도를 넘어서는 마태오의 저주를 그리스도교가 상속받아야 하는가. 모든 신학자들을 고뇌하게 만드는 마태오 23장이다. 한마디로 마태오 23장은 모든 신학자에게 제대로 된 신학자인지 아닌지 판가름해주는 시험문제다. 다행히 교회사에서 오늘 본문이 그리스도교의 승리주의와 연결되어 해설되지는 않았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예수가 다시 오면 다시 목놓아 부르짖을 말씀이다. 세계 3대 종교의 공동 근거지인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는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강정아, 한반도야, 예루살렘아, 시리아야, 오늘 너에게 평화를 빈다.
Posted on: Mon, 02 Sep 2013 22:4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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